두 얼굴의 스크린: 일상에 던져진 파문, 그리고 잔혹한 생존 게임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강렬한 푼수 스튜어디스 최혜정으로 대중의 뇌리에 박혔던 배우 차주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차분하고 똑 부러지는 대기업 비서실장이다. 지난 22일 열린 KBS 2TV 새 주말극 ‘진짜가 나타났다!’ 제작발표회에서 그녀는 전작의 흔적이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며 꽤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혜정의 잔상이 너무 강해 새 작품에 들어가는 게 부담되지 않느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지금 제 모습에서 혜정이가 보이나요?”라며 여유롭게 웃어 넘겼을 정도다. 그녀가 연기하는 장세진은 적당히 무심하면서도 세련된, 우리 주변에서 은근히 마주칠 법한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공태경이라는 썩 괜찮은 동아줄을 잡아채려는 야망을 품은 채 말이다.
이번 드라마는 주말극치고는 꽤나 흥미로운 설정들을 끌어왔다. 국어영역 일타강사이자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미혼모 오연두(백진희), 그리고 산부인과 난임 클리닉 전문의지만 굳건한 비혼주의자인 공태경(안재현)이 가짜 계약 로맨스로 얽힌다. 곽시양의 하차로 급하게 합류한 안재현은 매일 최선을 다해 극을 쫓아가고 있다며 소감을 전했고, 강부자나 김창완 같은 든든한 베테랑들이 극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아준다. 한준서 PD의 말마따나 요즘 안방극장은 자극적이면 막장이라 욕먹고, 착하면 심심하다고 외면받는 피곤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혼전임신이나 비혼주의 같은 묵직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며 ‘욕먹지 않는 막장과 심심하지 않은 재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보겠다는 연출자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렇게 국내 주말 안방극장이 얽히고설킨 관계와 현실적인 사회 문제 속에서 따뜻한 돌파구를 찾고 있다면, 화면을 넷플릭스로 돌리는 순간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극단적인 생존 스릴러가 펼쳐진다. 할란 코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 ‘I Will Find You’다.
범죄 미스터리나 음모론에 환장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할란 코벤이라는 이름표만으로도 무조건 재생 버튼을 눌렀을 테다. 흥미로운 건 이 8부작 시리즈가 할란 코벤 원작의 넷플릭스 제작물 중 최초로 미국 본토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폴란드,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온갖 국가를 돌고 돌다 드디어 원작의 배경인 미국으로 돌아온 셈이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만들었던 코벤의 YA 시리즈가 탄탄한 팬덤에도 불구하고 시즌 1 만에 캔슬된 뼈아픈 과거를 생각하면, 이번 시리즈의 스케일과 밀도는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충분해 보인다.
이 시리즈의 설정은 시작부터 지독하게 잔인하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줄곧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눈앞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이 날아든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미칠 노릇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체불명의 거대한 세력이 그를 죽이려 든다. 돈으로 사람을 입막음하는 건 예사고, 안 통하면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꽤나 깊고 어두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결국 데이비드는 살아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그리고 어딘가에 살아있을 아들을 찾기 위해 목숨 건 탈주를 감행한다.
명색이 코벤의 첫 미국 배경 넷플릭스 시리즈인데, 주인공 데이비드 역을 호주 출신의 샘 워싱턴이 꿰찼다는 건 살짝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억울한 사연을 품은 아버지의 처절함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데다, 극 중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와 목소리 톤까지 소름 돋게 흡사해 몰입을 깰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브릿 로어가 데이비드의 전 처제 역으로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고, 에린 리처즈가 전처 역을, 애런 애쉬모어가 그녀의 새 남편 역을 맡았다. 이 밖에도 에릭 존슨, 마일로 벤티밀리아, 조나단 터커, 매들린 스토우, 클랜시 브라운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합류해 극의 텐션을 꽉 조여준다.
뻔할 것 같은 로맨스의 틀을 깨고 미혼모와 비혼주의의 충돌을 그려내는 한국의 주말극, 그리고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진실을 좇아 내달리는 미국의 범죄 스릴러.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이 두 세계는,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를 부수고 나아가려는 인간의 발버둥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